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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본디 사랑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뿐이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타인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 일은 언제나 요원해 보인다. 때때로 사랑은 저급한 욕망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인간은 그것이 자신의 순수성을 해치는 일이기에 사랑을 우상화하고 숭고한 것으로 포장하곤 한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낸 가공의 환상은 결국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오시미 슈조의 <악의 꽃>은 청소년기의 미숙한 사랑과 그 과정에서 겪는 자아의 붕괴를 처절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흔히 일본 문학 특유의 정서를 두고 ‘음습하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 작품은 그 음습함을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드러낸다. 오히려 그 불쾌할 정도의 솔직함이 이 작품을 대단하게 만든다.
주인공 카스가 역시 문학이라는 껍데기 뒤에 숨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지만, 보들레르의 시집 뒤에 숨겨둔 비겁한 욕망을 나카무라에게 간파당하며 안식처였던 일상은 파괴된다. 자신이 사랑한 껍데기가 벗겨지자 폭주하는 사에키와, 그 껍데기를 스스로 찢어발기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카스가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상호간의 오독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작품의 결말부에서 카스가는 마침내 이 모든 고통의 굴레를 끊어낸다. 그는 나카무라와 사에키로 대변되는 과거의 비정상적이고 파괴적인 인연들을 정리하며, 그토록 붙잡으려 했던 가짜 자아를 완전히 부수어버린다. 바닥 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추악하고 초라한 나신(裸身)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나서야, 카스가는 비로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이후 새로운 곳에서 만난 인연인 토키와와의 관계는 이전의 사랑과는 궤를 달리한다. 우상화도, 투사도 아닌 서로의 상처와 평범함을 공유하는 이 새로운 사랑은, 카스가가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온 뒤에야 얻을 수 있었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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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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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허무의 혼돈속에서 끊임없이 질서를 이룩하고자 하고 그 하찮은 질서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의미가 필요하다. 우주의 한 귀퉁이를 포획해 정연한 모습으로 다듬어 위안으로 삼는 행위. 이러한 의미를 부서트릴 결정적인 증거 앞에서 인간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대개는 자기기만을 강화시키며 그 견고성을 침해할 모든 것에 대해 적대적으로 반응한다. 일부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스스로 우상을 부수고 새로운 의미를 건조해낸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며 종국엔 삶에 어떠한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한한 자유이기도 하지만 무한한 상실감이기도 하다. 결국 자기기만과 그릇된 믿음은 타파되었고 우주 앞에, 혼돈 속에 나신으로 나동그라진다. 냉소만으로 바꿀 수 없는 허무 앞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사랑이다.

“나는 평생 광대신발을 신은 허무주의자 같은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려 노력했다. ”
“나는 왜 아버지처럼 저렇게 살 수 없는걸까? 내가 잘못하고 있는게 뭘까? 그 답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마음에 나는 계속 책을 읽으며,”

과학서적이자 로맨스물이자 철학서인, 말도 안되는 조합이 가능한 놀라운 책. 사실 읽은지는 굉장히 오래 되었지만 이제서야 정리가 끝남...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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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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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보던 철학 유튜버인 ‘개념쌓기’에서 1시간 리뷰가 올라왔길래 뭐라 하는지나 들어보려고 생전 안보려던 종류의 영화를 보러갔다. 엄청 유행하는 거 치고는 그정돈가 싶었던 영화. ‘개념쌓기’에서 한 리뷰도 뭔가 공업용 영상 느낌. 세이렌은 넘나 귀엽구요 다람쥐 개찢어버리고 싶구요 우사기 랩 연습했으니까 얘기하면 들려드림. 푸르rrrrr 야하!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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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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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 (3)

4장. 그럼에도 가능한 사랑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선의만으로 간극을 메울 수도 없다면,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능한 사랑》은 이 질문에 단정적인 답을 내놓는 대신, 타인과 같아지려는 시도와 관계의 거리를 스스로 결정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미옥은 상우를 해변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함께 옷을 벗고 물놀이를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격차가 놓여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동등한 나신의 인간이다. 미옥은 상우와 자신이 다르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임을 확인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물놀이가 끝나자 상우는 미옥에게 성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는 관계의 역전이다. 욕망하는 주체였던 미옥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상우와 예지는 그들이 의도와 무관하게 미옥의 욕망을 채워주었다. 만약 미옥이 이들과 같아지고자 했다면 상우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옥은 이를 거부하고 자리를 뜬다. 이는 미옥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같아지려는 시도 끝에 차이를 인정하되, 그 차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정하는 것이다.

미옥이 예지에게 달 사진을 보내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미옥은 자신이 바라본 달을 예지에게 건네려 한다. 앞서 예지의 카메라에 담겼던 미옥이 이제는 스스로 바라본 것을 나누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놓여 있던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건네는 주체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러나 미옥은 끝내 사진을 보내지 않는다. 사진을 보내려는 시도는 수영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계의 방향을 바꾸려는 움직임이다. 베풂을 받는 존재에서 베푸는 존재로, 타인의 시선에 놓인 존재에서 자신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건네는 존재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미옥은 예지와 다른 선택을 한다. 예지가 미옥과 호석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했듯, 미옥 역시 자신의 경험을 나눔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하지만 미옥은 그 시도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 예지의 선의가 자신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다가가려는 마음만으로 상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을 보내지 않는 것은 관계를 포기하는 행위라기보다, 관계를 맺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가 상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를 헤아린 끝에 멈추는 행위일 수 있다.

미옥은 상우의 욕망을 거부하며 관계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달 사진을 건네려는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멈춘다. 하나는 타인의 욕망에 응답하지 않을 권리를 확인하는 순간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선의로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으려는 순간이다. 두 장면에서 미옥은 더 이상 타인의 행동에 반응하기만 하는 인물이 아니다. 다가갈지 물러설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건넬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물러섬이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미옥은 타인과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 자신의 마음이 언제나 상대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타인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와의 거리를 임의로 좁힐 수는 없다. 상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만큼이나, 그가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사랑》이 말하는 사랑은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품되, 그 마음이 상대의 삶을 대신하거나 그 경계를 지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 일에 가깝다. 미옥은 끝내 사진을 보내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운 달을 공유하고자 하는,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다가가려는 시도와 물러섬 사이에서 스스로 관계의 거리를 결정한다.

우리는 타인과 같아질 수 없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다가가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세계가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손을 내미는 일이 사랑일 수 있고, 때로는 그 손을 거두는 일이 사랑일 수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사랑은 어디서든 가능하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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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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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 (2)

3장. 가능한 만큼의 사랑

우리는 흔히 사랑을 무한한 것으로 상상한다. 사랑한다면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의 사랑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힌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모든 것을 내어줄 수는 없고,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예지와 상우는 미옥과 호석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건넨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진 여유가 곧 모든 것을 내어줄 의무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호의는 진심일 수 있지만, 그 진심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별개의 문제다. 타인을 위한다는 마음과 타인의 삶을 책임지는 일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미옥과 호석에게도 적용된다. 미옥은 노동조합을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 뒤편의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과 모든 노동자를 바라보는 일은 다르다. 호석 역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견디기 어려워하지만, 그가 초라하게 여기는 일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이어가는 터전일 수 있다는 사실까지 충분히 헤아리지는 못한다. 노동조합 또한 호석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지켜주지 못한다. 연대 역시 모든 구성원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타인을 외면하기만 하지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위하고 함께하려 하지만, 그 마음은 자신이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상대의 삶을 이해하려 할 수는 있어도 그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를 사랑의 부재로 보아야 할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삶을 전부 내어주어야 한다면, 사랑은 실천 가능한 감정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된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타인을 위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랑은 무한한 희생으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그 한계가 낳은 상처까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선의로 한 행동이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진심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결과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일은 모든 실패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실천 사이의 거리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결국 사랑은 타인과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의 삶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안고 관계를 맺는 일에 가깝다. 그 관계가 언제나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불완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마음까지 거짓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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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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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 (1)

1장. 이야기와 간극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시선과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는 이러한 모순을 떠안은 인물이다. 예지는 소수자의 삶을 기록하고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그러나 그 진심은 타인의 삶을 작품의 재료로 삼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예술적 성취를 향한 욕망은 선의와 공존할 수 있다. 예지는 이창동 자신의 고민이 투영된 인물이자, 타인의 삶을 재현하는 모든 창작자가 마주하는 모순의 표상이다.

이 모순은 예지가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미옥은 숲속에서 절규하는 호석을 목격하고, 카메라를 들고 따라온 예지를 발견한다.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던 예지는 정작 미옥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카메라를 멈춘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과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일 사이에는 분명한 비대칭이 존재한다. 예지의 카메라는 타인을 향한 진심의 도구인 동시에, 그 진심이 도달할 수 없는 경계를 드러낸다.

그렇다고 예지를 위선자라는 말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녀는 미옥과 호석을 진심으로 위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한다. 다만 선의가 곧 완전한 이해를 뜻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전달된다는 보장도 없다. 예지의 모순은 선의가 거짓이라는 데 있지 않다. 타인을 위하려는 마음과 그 마음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는 한계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예지는 창작자 자신의 윤리적 고민을 드러내는 인물로 읽힌다. 타인의 고통을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그 고통을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자신의 언어와 시선으로 그것을 재구성한다. 타인의 삶은 창작자의 소유가 될 수 없지만, 작품 안에서는 창작자의 시선을 통해 존재한다. 예지가 마주하는 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감독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고 기록하며 때로는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 역시 그 모순에서 자유롭지 않다.

2장. 질투와 아비투스

아득한 차이는 질투를 낳지 않는다. 오히려 질투는 나와 무관한 타인보다 나와 동일시할 수 있을 때 발생한다. 예지와 상우, 미옥과 호석은 옷과 자동차, 집은 물론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처음 미옥에게 예지는 그저 ‘감독님’일 뿐이다. 그러나 예지가 구체적인 한 인간으로 다가올수록 두 사람의 차이는 선명해진다. 동일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예지의 비싼 옷과 자연스러운 호의를 오히려 더 거슬리는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간극은 호석과 상우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술에 취한 호석이 욕조에 소변을 보자 상우는 그를 꾸짖는 대신 웃으며 똑같이 행동한다. 차라리 호통이라도 쳤으면 마음이 편했으련만. 호석을 무안하게 하지 않으려는 듯한 상우의 행동은 지독할 정도로 상스러운 나이스함이다. 그는 호석과 자신을 같은 위치에 놓는 듯하지만, 그 행동이 두 사람의 현실까지 같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우의 여유로운 대응은 호석이 처한 무력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다음 날 숲속에서 터져 나오는 호석의 절규는 이러한 간극을 온몸으로 토해내는 듯하다. 두 사람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지만 같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동질성이 삶의 조건까지 평등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미옥의 질투와 호석의 절규는 서로 다른 감정이지만, 모두 인간 사이의 같음과 다름에서 비롯된다. 차이는 공통점에서 더욱 부각된다. 상대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할수록 그가 누리는 여유와 자신이 감당하는 현실의 차이는 더욱 견디기 어려워진다. 영화는 이를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결코 같을 수 없는 삶의 조건이 한 세계 안에 공존한다는 모순을 드러낼 뿐이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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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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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리뷰에서 오디세이아를 재해석한 건 독창적이지만 그 해석해낸 결과는 독창적이지 않다고 했는데 이 영상에서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를 구체적으로 파헤쳐줬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재해석 또한 오디세우스의 ptsd적인 해석은 조너선 세이의 ‘미국의 오디세우스‘에서, 키르케나 칼립소, 페넬로페에 대한 해석 또한 페미니즘 사조 내에서 이미 흔하게 다뤄졌다고 한다. 결론은 독창적인 건 없지만 레퍼런스를 열심히 공부한 느낌이란다. 영상에서는 전체적으로 혹평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각적인 장엄함이나 이러한 주제들을 한 편의 영화로 잘 엮어낸 것은 철학 비전공자이자 오디세이 문외한 입장에서는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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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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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까지 하루미치 개패고 싶고 츠네미가 진짜 순애지 했는데 9화 보니깐 모든게 미화됨. 장면이 너무 사기적이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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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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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세션 보고 담날 봤는데 뭔가 뭔가 비슷한 느낌. 덜 호러틱한 대신 내면 묘사에 집중된 옵세션 느낌? 사실 내용적으로 비슷하다기 보다는 남주의 찌질함 내지 발암력이 비슷한 거 같다. 사실 여주가 총기난사 결심했었다고 커밍아웃 한 거에 대해 나는 별 생각 안들었는데 주변 인물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보고 미국인 입장에서는 큰 문제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영화내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된 내용 보니 쵸큼 그렇긴 하던데(막 캠으로 총 들고 쇼하는 모습 등) 그냥 현장에서 들었으면 많이 힘들었구나 내지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이 들거 같다. 개인적으로 젠데이야 연기를 별로 안 좋아했는데 배역에 맞게 연기를 한다기 보다는 원패턴으로 연기를 해 챌린저스 같은 맞는 역할에는 정말 최고였지만 듄에서는 정말 별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드라마에서는 다른 느낌이지만 호연을 펼치는 젠 데이야를 봐서 좋았다.

다만 후반부 전개가 좀 아쉽. 영화의 파국은 여주의 비밀 그 자체보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주에게서 비롯되는데, 이 과정이 뒤로 갈수록 다소 작위적이다. 미묘한 심리 묘사를 통해 어느 편을 들기 힘든 상황에서 고조되는 갈등을 보여주는게 이영화의 매력이라 생각하는데 남주가 멘붕이 와서 직장 동료와 관계를 가지려다 어설프게 마는 장면은 ‘얘를 욕해주세요!’ 느낌으로 미묘한 상황을 종식시키고 귀책을 지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다시 시작하는‘ 화해 장면의 수미상관을 맞추기 위해 남주의 트롤링으로 서사를 일부러 극단적인 파국으로 몰아붙였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도 수미상관은 역시 맛도리 굿.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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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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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의 문법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원작이자 사실상의 시나리오 격인 이청준의 소설 『축제』와 임권택의 영화 『축제』를 이어서 보니 좀더 와닿았다. 원작의 복잡다단한 화두를 어떻게 압축하고 영화적으로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소설 『축제』가 작가의 작품 세계와 여러 화두를 집대성한 내면적 성찰에 가깝다면, 영화 『축제』는 초상집 마당에 모여든 가족 간의 애증과 갈등의 폭발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는 많은 부분이 과감히 생략되었다. 초반의 주요 반전이었던 어머니의 회생도 ”할머니 또 돌아가신 거야?“라는 은지(준섭의 딸)의 대사로, 지루할 수 있는 귀향길도 생략하며 13분 만에 소설의  초반 3장 분량을 마무리한다. 또한 이념 갈등으로 시선이 분산될 수 있는 어머니의 처가 내력과 한국전쟁 당시 친척들의 일화 등도 과감하게 덜어냈다. 대신 출상 전날 초경까지의 시간에 등장인물들의 설명을 위해 분량을 넉넉하게 할애했다.
인물의 배치와 기능 또한 재편되었다.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기자‘의 역할이 소설에서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내면 독백을 대신 이끌어내기 위해 기자가 끊임없이 관찰하고 질문하는 화자로 전면에 나선다. 그에 따라 원작에서 준섭과 기자의 대화였던 ’빗새 이야기‘는 기자와 용순의 대화로 옮겨가고, 화해의 단초인 ’준섭의 동화‘ 역시 기자를 매개로 용순에게 전달된다.
어머니가 아이로 돌아가는 동화의 이야기가 본편이 교차 삽입되는 연출도 좋았다. 현실적인 초상집 사이로 연극적이고 몽환적인 우화가 파고들면서, 이 죽음의 의식이 ’순환과 축제‘가 될 수 있는지(제목 ‘축제‘는 감독의 주장이었다고 한다.)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글로만 읽었을 때 다소 난해하고 막연하게 다가왔던 전통 장례 절차도 시각적으로 보니 좀 더 명확하게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청준의 소설에서 ’소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솔직히 고루하게 느껴지고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용순이 〈칠갑산〉을 부르는 장면에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990년대 중반이라는 시기에도 이정도 편집과 다채로운 인물 군상을 한 호흡으로 엮어낸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임권택 감독의 다른 명작들오 찾아보고 싶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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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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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축제』는 그의 문학 세계에 있어 하나의 종합점이자 해소점이다. 지금까지 그가 쌓아왔던 문학적 자산과 주제 의식들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통해 한자리로 총집된다. 소설은 감독에게 보내는 편지, 장례식에 대한 서사, 그리고 준섭이 썼던 텍스트들이 교차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다층적 구조는 내화와 외화 사이에 절묘한 거리감을 만들어내며, 텍스트의 복잡성을 추가함으로 장례식이 지닌 의미를 더욱 다채로운 층위로 전달한다.

장레식은 정신없는 아수라장이다.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사사건건 훈수 드는 동네 노인네들부터 시작하여, 온갖 인간군상의 면면이 날것 그대로 폭로된다. 고인의 죽음을 호상이라 치부하거나 상갓집 소리를 채워준다며 노름판을 벌이다가 밑천을 탈탈 털리고 열불을 내는 양반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이복조카 용순이, 남 뒷담화나 까대기 바쁜 일가친척들, 상여꾼이랍시고 불렀더니 당일날 술에 취해 늦는 친구들, 술 먹고 힘들다며 집으로 가버리는 소리꾼까지. 그러나 이 지독한 혼란과 소란이야말로 장례식을 '축제'로 전환해 주는 카니발(Carnival)적 생명력이다.

이 혼돈속에서 가족이라는 애증은 여실히 드러난다. 몇십 년 동안 치매 노모의 수발을 한 외동댁은 그냥 노친네가 콱 죽었으면 속이 시원하겠다싶으면서도, 막상 숨을 거두자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에 아파한다. 이는 가식이나 이중성이라기보다는, 본디 인간의 감정이란 이토록 복합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주인공 준섭의 복잡한 심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모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온전히 독립하고 싶어 한다. 밀어내기에 도리어 사무치게 그리워하지만, 만약 밀어내지 않고 곁에 묶여 있었더라면 진절머리를 내고 말았을 가족이라는 끈적한 관계의 본질을 응시한다.
이청준 전집의 궤적을 충실히 쫓아온 독자라면 『빗새 이야기』가 사실 용순의 이야기라는 것에서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찾아보니 용순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용순의 서사가 실제 인물이 아닌 작가의 철저한 허구라면 그 역할은 무엇일까. 준섭(작가)은 용순이라는 날카로운 내부 고발자의 입을 빌려 "가족들 이야기를 팔아먹고 어머니 모시는 것을 핑계로 미루어온 자신"을 매섭게 채찍질하며, 관찰자인 장혜경을 통해 가족들의 숨겨진 사연과 자신의 부끄러운 내면을 증언하게 만든다. 결국 용순과 혜경은 준섭의 또 다른 자아(죄책감과 서사적 장치)인 셈이다. 가상의 인물을 통해 스스로를 고발하고 또 그를 회의하는 미장아빔적 구조는 자기합리화인 동시에, 그 합리화의 과정마저 정직하게 텍스트로 폭로해 버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화해에 도달한다.

마침내 용순이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결말부에서  나름의 뭉클함을 느꼈다. 요란했던 소음이 잦아들고 새로운 조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면 이들은 다시 일상의 애증 관계로 복귀하겠지만, 그 화해의 짧은 순간만큼은 사진처럼 마음에 영원히 박제된다. 이는 《비화밀교》에서 산 위의 거룩한 화해가 아래 세상의 세속적인 언어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산 위에서의 숭고한 화해의 가치 자체가 소멸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늘날 전통적인 의례의 가치는 흔히 절하되곤 하지만, 나는 '의식과 의례'가 인간과 그 삶에 있어 중요하다고 여긴다. 유·불·도가 섞인 정통성 없는 장례식일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그 난장판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들이는 정성과 온전한 마음 쓰기이다. 인간은 과거를 되돌릴 수 없고 떠나간 부모에게 못다 한 효도를 완벽하게 청산할 길도 없다. 이 부채감의 탕감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온 맘을 다한 의례를 통한 일종의 정신적 승리이다.

작가 또한 이것이 완전한 현실적 청산이 아닌 문학적이고 정신적인 승리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만 냉소주의자가 되는 대신,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실존을 지켜내는 존엄한 방식이 아닐까. 『눈길』에서 드러난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모성에 대한 부채감은, 마침내 『축제』라는 지극한 정성의 의례를 통과하며 가장 아름다운 해방과 해소점에 도달하게 된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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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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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곡 시대』 —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3
- 일테면 옳고 그름의 심판을 떠나서 사람의 본성과 삶의 길에는 그 부인에게서와 같은 아름다운 환상과 빛나는 꿈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친척 형의 고발과 같은 잔혹스런 배반도 불가피할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죽음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 지하실을 나온 자존성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원망이 없이도 남의 뺨을 갈겨대는 맹목적 폭력성 또한 서글픈 속성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 — 다시 말해 사람과 삶의 길에는 그 밝은 곳과 어두운 곳(혹은 신성과 마성이라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이 함께 있을 수 있으며, 경우따라 그것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드러나 수 있음과 같이, 사람따라 그것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해하고 볼 수 있는 복합적 시선의 괴로운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이었다.
- ……나는 지금 깊은 꿈을 꾸고 있소. 이 깊은 꿈이 퍼뜩 깨는 날 나는 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멀리 날아갈 것이오. — 언젠가 그이가 제게 한 말입니다. 그때 저는 그의 그런 한 깊은 삶 곁으로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서로 얼마나 크나큰 외로움 속에 서럽게 마주 서 있는가를 절감했습니다……
- 그 같은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지시성에 비해 그것이 보다 큰 ‘돌아옴과 사랑의 길’이 되리라는 내 이차적 의미 해석은 너무도 관념적이고 무기력한 것이었다.
- 내 개인의 진심을 털어놓고 그것을 설명하고 주장하려 할수록 그 역기능만 자꾸 더해갈 뿐이기 때문이다.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연작은 다 너무 어려운 듯…

『잃어버린 절』 —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4
경지에 오른 작가와 아닌 작가의 가장 큰 차이는 별 거 아닌 스토리로 깊은 내용을 뽑아 내느냐에서 갈리는 거 같다. 탑산사를 찾아 헤매는 단순한 줄거리로 이렇게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다니……

『키 작은 자유인』 —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5
자유란 어디서 비롯되는 가. 타인을 지배하는 자를 자유로운자라 일컫지 않듯이 진정한 자유는 타인, 즉 외부에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면의 결핍을 완전히 채우는 것 또한 자유라기엔 미진한 부분이 있어보인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키 작은 자유인』에서는 작가가 생각하기에 ‘자유인’에 걸맞은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강력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지만 자신의 불구성을 인정하고 세상과 자신의 어떤 환상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자유란 결핍과 허무를 긍정하는 노력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관의 소』
- “그 양반 자신의 그림과삶을 철저한 과정으로만 살고 가신 떄문이었겠지. (중략) 자기 그림의 평가를 후세에 맡기고 간 도미에란 사람은 그림을 삶의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승부의 목적으로 삼았던 셈이거든…… 선생은 끝내 자신의 그림에마저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고 가신 거지.”

비워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 과정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삶.

『용소고』
- 그러나 그러한 설화성 표상은 그것을 낳게 한 실제 인물의 정체가 드러나면 그 표상으로서의 구실을 더 못하게 되고 말지. 실제의 인물이 그 상징적 표상성을 죽여버리고 마니까. ……사람들이 흔히 마을 앞 연못 속에 용이란 영물을 기르는 것과 같은 이칠세. 사람들은 제 일에 길운을 열고 흉변을 피하기 위해 연못 속에 그 용이란 영물을 기르지만, 그 실은 연못의 물속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그걸 기르고 있는 걸세. (중략) 용이란 원래 실체가 없는 마음속 표상이라, 그것은 거꾸로 그 용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밖에 되질 않아.

결국 실존하는 우상은 허물어질 뿐. 이야기 속의 표상만이 살아 숨쉴 수 있는 것이다. by @woo0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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